
페루라는 나라를 먼저 세 가지로 정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첫째, 정치는 그야말로 막장입니다. 최근 10년 동안 대통령이 무려 9번 바뀌었고, 잇단 탄핵과 자칭 쿠데타, 전직 대통령 수감이 줄을 이었습니다.
둘째, 그런데 거시 경제는 의외로 멀쩡합니다. 2025년 물가 상승률은 1.5%로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적인 축이고, 성장률은 3.4%, 국가부채는 GDP의 30% 수준에 불과합니다. 세계 2위급 구리 생산국답게 광물이 수출의 55%를 떠받치고, 페루 화폐인 솔(sol) 환율도 정권이 무너지는 와중에 비교적 잔잔합니다.
셋째, 그럼에도 국민의 체감은 정반대입니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빈곤선 아래에 있고, 치안은 뒤에서 보겠지만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정리하면 거시 지표는 버티는데 정치와 일상은 무너진 나라, 그게 지금의 페루입니다. 바로 이 페루가 새 대통령을 뽑고 있고, 그 한복판에 대통령직을 세 번이나 놓쳤던 후보가 네 번째 도전 만에 결선 선두로 올라섰습니다. 주인공은 케이코 후지모리(Keiko Fujimori), 1990년대 페루를 통치하다 독재자라는 낙인이 찍힌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장녀입니다.

더 흥미로운 건 시장의 평가입니다. 폴리마켓은 결선 승자를 묻는 마켓에서, 케이코에게 벌써 약 70%라는 가격을 붙여뒀습니다. 지난 4월 12일 1차 투표에서, 케이코는 후보 36명이 난립한 가운데 17.19%로 1위에 올랐습니다. 2위는 좌파 로베르토 산체스(Roberto Sánchez)로 12.04%에 머물러 있습니다.
페루 헌법에 따라 과반을 넘긴 후보가 없는 경우, 1·2위가 결선에서 다시 붙습니다. 6월 7일(일), 결선 투표는 어제 끝났고, 현재 실시간 개표가 진행중입니다. 개표가 절반 가까이 진행된 가운데 케이코가 50%대 초반으로 줄곧 앞서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에 폴리마켓 "페루 대선에서 누가 승리할까?" 마켓에서 케이코는 약 70%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페루 국민 상당수가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분위기입니다. 왜일까요?
2. '쓰레기통 선거', 시작부터 난장판이었던 페루 대선

이번 페루 대선은 후보가 너무 많아서 투표용지부터 사고였습니다. 1차에 대통령 후보만 36명이 쏟아진 데다 부통령·상하원·안데스의회 의원까지 한 장에 욱여넣다 보니, 투표용지는 가로 44cm 세로 42cm짜리 초대형으로 제작됐습니다. 한 외신은 이걸 두고 "엑스라지 피자 상자보다 크다"고 표현했죠. 유권자가 그 거대한 종이에서 후보를 찾아 표시하는 것부터가 일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운영이었습니다. 리마 남부의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가 제때 도착하지 않아, 새벽부터 줄을 섰던 약 6만 3,300명이 끝내 투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개표 과정에서 결정적인 장면이 터집니다.
리마 수르코의 한 쓰레기통에서 봉인된 투표함이 발견된 겁니다. 투표지 약 1,200장이 담긴 봉인 상자가 길거리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죠. 선관위(ONPE)는 "운반 중 부주의"라고 해명했지만, 선거 심판 기관인 JNE의 위원장은 의회에서 그 해명을 두고 "거짓"이라고 정면 반박했습니다. 결국 피에로 코르베토(Piero Corvetto) ONPE 위원장은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사법 당국의 수사 대상에 올랐습니다.
여기에 개표까지 지연되면서, 3위 후보 로페스 알리아가는 재투표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국제선거감시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지에서는 "누가 당선되더라도 정통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쓰레기통 선거'라는 별명이 붙은 이번 대선은, 결과만큼이나 그 결과를 향한 불신이 함께 자라고 있는 선거입니다.
3. 🇵🇪 페루의 잃어버린 10년, 왜 '범죄와의 전쟁'이 됐나

페루를 좀 더 들여다 보겠습니다. 대통령이 10년 새 9번 바뀌는 동안 의회와 대통령은 끊임없이 충돌했고, 2022년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자칭 쿠데타 미수와 수감, 2025년 디나 볼루아르테(Dina Boluarte) 탄핵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통령의 저주"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게 됐고, 의회가 사실상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의회 독재'라는 비판까지 나왔습니다.

정치가 휘청이는 사이 치안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인구 10만 명당 살인율은 2020년 5.8명에서 2025년 10.7명으로 5년 만에 거의 두 배가 됐고, 2025년 1~8월 살인 건수만 1년 전 같은 기간 대비 14.6% 늘었습니다.
더 일상적으로 페루인을 짓누른 건 갈취였습니다. 신고된 갈취 건수는 2019년부터 2024년까지 6배로 불었고, 2025년엔 페루인 세 명 중 한 명이 "주변에 갈취 피해자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리마 최대 인구 지역인 산후안데루리간초에서는 주민 약 60%가 갈취를 당했다고 했죠. 베네수엘라계 초국적 갱단 트렌 데 아라과(Tren de Aragua)를 비롯한 조직범죄가 버스 기사와 동네 상인에게까지 '돈을 내라'며 손을 뻗는 사이, "정부가 범죄를 막지 못한다"는 분노가 거리를 채웠습니다.
거시 지표가 멀쩡하다는 통계는 인구 3분의 1이 빈곤선 아래인 현실, 그리고 매일같이 터지는 부패 스캔들 앞에서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결국 "범죄와의 전쟁"은 페루 유권자의 가장 절박한 외침이 됐습니다. 안전을 약속하는 강한 후보를 원하는 정서, 바로 이 공기를 한 사람이 통째로 빨아들였습니다.
4. '철의 여인' 케이코, 후지모리즘을 다시 꺼내다

이런 시국에 1위를 달리고 있는 후보, 만 51세의 케이코 후지모리는 페루 정치의 산증인입니다. 19살이던 시절 일본계 아버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부에서 사실상 '영부인' 역할을 맡았고, 아버지가 부패 스캔들 끝에 일본으로 도피한 뒤로는 '후지모리즘(Fujimorismo)'의 계승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후지모리즘이란 강경 우파, 친기업·경제 안정, 그리고 무엇보다 '강한 손'으로 불리는 권위주의 통치를 묶은 노선을 말합니다. "민주주의는 약해선 안 되고, 확고한 권위로 뒷받침돼야 한다"는 게 그녀의 철학입니다.

그녀가 물려받은 유산은 명암이 뚜렷합니다. 아버지 알베르토는 1990년대 좌익 게릴라를 진압하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잡아 경제를 안정시킨 인물로 기억되는 동시에, 강제 불임수술과 초법적 학살 같은 인권 유린, 대규모 부패로 독재자라는 낙인이 찍힌 인물이기도 합니다.
케이코의 공약은 그 강경 노선을 21세기 버전으로 되살린 것에 가깝습니다. 엘살바도르 부켈레식 메가 교도소 건설, 군·경찰 총동원, 범죄자와의 협상 폐기, 마약 카르텔 소탕, 그리고 60일짜리 비상사태 선포까지. "테러를 끝내겠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안보 단일 구호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그늘은 짙습니다. 브라질 건설사 뇌물 사건과 연루돼 돈세탁·범죄조직 혐의로 2018년 예방적 구금까지 당했고(이후 일부 혐의는 무죄), 아버지 시대의 인권 유린을 옹호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습니다. 수천 명이 "독재자의 딸은 안 된다"며 거리로 나서기도 했죠. 그럼에도 리마와 도시, 중산층·보수층은 그녀를 "안보의 상징"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버지가 한 번 페루를 구했듯, 케이코가 다시 구할 것"이라는 집단 기억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5. 도전자 산체스, '카스티요의 그림자'를 진 좌파

반대편의 산체스는 결이 완전히 다른 인물입니다. 만 57세의 심리학자 출신으로, 카스티요 정부에서 통상부 장관을 지낸 전 의원입니다.
핵심 정체성은 단 하나, 전임 대통령의 후계자라는 것입니다. 2021년 농촌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깜짝 당선됐다가 쿠데타 미수로 탄핵·수감된 페드로 카스티요. 산체스는 그 카스티요의 정치적 적자를 자처하며 좌파 표심을 흡수했습니다. 지지 기반도 카스티요와 겹칩니다. 농촌과 안데스 산악 지역, 원주민, 빈곤층이죠. 공약은 사회 복지 확대, 경찰 개혁, 시민 참여형 개헌, 그리고 후지모리 정권 피해자 배상으로 후지모리즘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문제는 '카스티요 계승'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양날의 검이라는 점입니다. 농촌 빈곤층에겐 "우리 편"이지만, 안전을 갈망하는 도시 표심에겐 쿠데타 미수로 얼룩진 좌파 노선이 '또 다른 불안정'으로 읽힙니다.
뿐만 아니라 산체스 본인도 최근 당 자금 유용 의혹으로 기소되며("당 재무 책임자였을 뿐"이라고 반박) 도덕성 공세에 시달리고 있죠.
6. 비상! 글을 쓰는 도중 확률 역전

한편, 글을 쓰는 도중에 후보 역전이 일어나버렸습니다! 곧 그 이유를 찾아 댓글로 공유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구도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분석가들은 이번 결선을 "페루 현대사에서 가장 이념적으로 양극화된 대결"이라고 평가합니다. 철퇴냐 개혁이냐, 안보 우선이냐 복지 우선이냐. 가운데가 텅 빈 양 극단의 정면충돌입니다. 다만 남미 정치만큼 각본대로 흘러가지 않는 무대도 드뭅니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와중에 확률이 급변한 것이구요.
과연 케이코의 70%가 굳어질지, 산체스 쪽으로 가격이 되돌아올지. 개표가 진행되는 며칠 동안 마켓 가격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이번 페루 대선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입니다.
✍️ TL;DR
우파 케이코 후지모리(1차 17.19%)와 좌파 로베르토 산체스(12.04%)의 6월 7일 결선.
후보 36명 난립에 '피자 상자만 한' 투표용지, 6만여 명 투표 불발, 쓰레기통서 발견된 투표함과 선관위원장 사임까지. '쓰레기통 선거' 후유증으로 누가 이겨도 정통성 논란이 따라붙는다.
10년간 대통령 9번 교체라는 정치 혼란 + 살인율 5년 새 2배·갈취 6배로 번진 "범죄와의 전쟁" 정서가, 아버지의 강경 유산을 이어받은 '철녀' 케이코를 네 번째 도전 만에 결선 선두로 밀어올렸다.
📎 Sources
Al Jazeera — Peru polls open in Keiko Fujimori, Roberto Sanchez presidential run-off
Peru Reports — Mounting irregularities cloud Peru's 2026 general election
PBS News — Peru's Fujimori and Sánchez to meet in June 7 presidential runoff
Atlantic Council — Peru's crime wave: A populist opening or a chance for re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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